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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미의 만물상자/헤이미의 연예인

2002 한일 월드컵 영웅 유상철 사망,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헤이미 2021. 6. 8.

 

 

2002 한일 월드컵 영웅 유상철 사망

한일월드컵 4강의 주인공 유상철 감독이 2021년 6월 7일 오후 7시 20분경 향년 50세의 나이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삶을 마감했다. 2019년 11월 19일 그가 몸담고 있던 인천 구단에서 그의 암 소식을 알리며 많은 팬들과 국민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이 비보를 듣게 된 국민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고 내 일처럼 마음으로 응원했다. 그런 응원에 힘입어 방송에도 가끔 얼굴을 비추며 동료들과 대중들을 안심시켰고 사람들은 그의 쾌유를 빌었다. 최근에도 '뭉쳐야 찬다'에도 출연하며 소식을 전했었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방송상에서는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최장암 4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는 다짐과 각오를 보여주며 마무리했다. 하지만 끝내 그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온 국민이 그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금치 못하며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유상철의 어린 시절 및 활약

考 유상철 감독은 1971년 10월 18일 서울시 은평구에서 태어났으며 응암초등학교 시절 축구부 선생님에 눈에 띄어 축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경신중, 경신고, 건국대학교를 졸업했고 1994년 프로 축구팀 현대에 합류한다. 그리고 당시 현대를 이끄는 감독은 축구계의 레전드 차범근이었다. 유상철에게 차범근은 우상적인 존재였다. 그의 모교 선배이기도 했으며 그의 롤 모델이었다. 그런 그가 차범근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독일의 분데스리가로 진출할 계획이 있었지만 1994년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면서 계획이 무산된다. 그러나 같은 해, 미국 친선경기를 통해 국가 대표 데뷔전을 치렀으며 아시안 게임에도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당시 8강전인 한일전에서 실점으로 고군분투하던 중 유상철은 동점골을 터트리며 승리를 안겨준다. 당시 언론은 갓 데뷔한 신인이었던 유상철이 국가대표 주요 포지션으로 뽑힌 이유를 뛰어난 파이터 기질과 뛰어난 제공권 장악 능력, 부상이 없는 내구성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실제로 2002년 월드컵에서도 모든 포지션에서 플레이가 가능한 선수로, 누군가에게 부상이 생기면 어떤 포지션이든 대신 자리를 메우는 멀티플레이어로 활약했다.

 

 

은퇴 후 행보

유상철은 2006년 왼쪽 무릎 부상이 악화되면서 은퇴한다. 그는 칭찬과 찬사만 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가 기본기가 떨어지고 볼터치 및 드리블 능력이 떨어진다 하였고 허공에 공을 많이 날린다 하여 홈런왕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유상철이 어린 시절에는 환경이 많이 낙후되어 있었고 체계적인 축구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을 때다. 현재 체계적인 시스템을 거친 선수들과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낙후된 시스템을 겪었던 유상철은 유소년 축구팀의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직접 축구교실을 운영하기도 하고 날아라 슛돌이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그 후에도 2009년 춘천기계공고의 감독을 역임했고 대전 시티즌을 맡아 데뷔전부터 승리를 거뒀다.

 

 

외국의 반응

유상철은 방송에서 왼쪽눈이 일찌감치 실명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2년 월드컵에 참가했을 때도 그는 왼쪽 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한다.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결정적인 골을 만들어냈고 4강 신화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활약은 J리그에서도 돋보였다. 요코하마 팀이었던 그는 80 경기 중 30골을 넣었던 선수로 일본인들에게도 사랑받는 선수이다. 그의 췌장암 말기 소식을 접한 일본 또한 충격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고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팬들 못지않게 그를 추모하는 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당신과 함께한 그날의 함성과 영광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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